영원한 약속의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 <냉정과 열정 사이 > 리뷰

책< 냉정과 열정 사이 >블루·레드 통합 리뷰: 피렌체에서 완성된 남녀의 입체적인 사랑 기록

교보문고


하나의 사랑을 두고 남녀는 얼마나 다른 기억을 공유하게 될까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로맨스 소설의 고전,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Calmi Cuori Appassionati)》는 이 발칙하고도 아련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남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블루(Blu)'와 여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레드(Rosso)' 두 권으로 나뉜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같은 시간 속 전혀 다른 마음의 행로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이 작품의 상징적인 배경인 이탈리아 피렌체의 매력부터 남녀 각 관점의 줄거리 분석, 그리고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린 느낀점까지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1. 영원한 약속의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가 지닌 문학적 상징성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제3의 주인공은 바로 이탈리아의 고도시 피렌체(Firenze)입니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 같은 피렌체는 소설 속에서 단순한 공간적 배경을 넘어 인물들의 심리와 주제 의식을 대변하는 강력한 상징물로 기능합니다.

피렌체는 '과거의 아름다움을 박제하고 복원하는 도시'입니다. 빛바랜 붉은 벽돌 지붕들과 수백 년의 세월을 버텨온 골목길은, 대학 시절의 첫사랑인 아오이를 잊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살아가는 쥰세이의 내면과 완벽하게 닮아 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헤어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던 약속의 장소, '두오모(Duomo) 성당'의 쿠폴라는 이 소설의 로맨틱한 정점을 장식합니다.

연인들의 성지로 불리는 두오모 쿠폴라에 오르기 위해서는 좁고 어두운 계단을 끝없이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외로움과 오해의 세월을 견뎌내야만 마침내 서로의 진심을 마주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고단한 사랑의 여정을 은유하는 듯합니다. 피렌체의 석양이 두오모를 붉게 물들일 때, 독자들은 인물들이 느끼는 고독의 깊이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게 됩니다.


2. 츠지 히토나리의 '블루(Blu)': 고독한 열정으로 과거를 복원하는 남자, 쥰세이

츠지 히토나리가 집필한 《블루》는 아오이를 떠나보낸 후 남겨진 남자, 아가타 쥰세이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피렌체에서 오래된 회화 미술품을 복원하는 유학생이자 조수로 살아가는 쥰세이의 삶은 언뜻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 있습니다. 그의 직업인 '미술품 복원사'는 깨지고 바랜 과거의 결과물을 현재로 온전히 되살리는 일입니다. 즉, 쥰세이는 매일 실무를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아오이와의 부서진 기억을 복원하고 싶어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셈입니다.

남자 관점인 블루에서 드러나는 쥰세이의 심리는 지독하리만치 무겁고 우울하며 고독합니다. 곁에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해 주는 새로운 연인 '메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쥰세이의 영혼은 단 한 순간도 현재에 정착하지 못합니다. 밀라노에서 우연히 아오이와 재회했을 때, 냉정하고 세련된 어른이 되어 부유한 미국인 애인 마빈과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쥰세이는 거대한 자괴감과 절망을 느낍니다. 하지만 블루 버전은 남자의 사랑이 얼마나 집요하고도 낭만적일 수 있는지, 겉으로는 냉정한 척하지만 내면에는 얼마나 뜨거운 열정의 불꽃을 품고 있는지를 조용하고 묵직한 어조로 증명해 보입니다.


3. 에쿠니 가오리의 '레드(Rosso)': 서늘한 냉정으로 상처를 감추는 여자, 아오이

에쿠니 가오리가 써 내려간 《레드》는 여주인공 아오이의 내면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봅니다. 밀라노의 세련된 아파트에서 완벽하고 다정한 조건의 연인 마빈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아오이는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가진 행복한 여자입니다. 보석 가게에서 일하며 고급스러운 취향을 향유하는 그녀는 얼음처럼 차갑고 이성적인 '냉정'을 유지하는 듯 보이죠.

그러나 레드 버전을 읽다 보면, 아오이의 냉정은 사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방어기제였음을 알게 됩니다. 아오이는 과거 일본 대학 시절, 쥰세이의 오해와 시부모의 압박으로 인해 가슴 아픈 낙태를 경험했고 그 상처로 인해 영혼의 절반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마빈의 화려한 세계 속에서도 그녀는 늘 혼자 욕조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고독을 씹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투명하고 감각적인 문체는 여자의 미묘한 감정선과 슬픔을 마치 만질 수 있는 질감처럼 투명하게 묘사합니다. 아오이에게 쥰세이는 지우고 싶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낙인이자, 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4. 냉정과 열정 사이, 남녀의 관점에서 바라본 진짜 줄거리와 엇갈림

두 소설을 관통하는 진짜 줄거리는 오해로 헤어진 연인이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다 마침내 약속을 이행하는 웅장한 소동극입니다. 대학 시절 격렬하게 사랑했던 쥰세이와 아오이는 뜻하지 않은 사건과 주변의 오해, 그리고 서툰 자존심 때문에 가슴 찢어지는 이별을 맞이합니다. 그때 아오이는 쥰세이에게 "서른 살이 되는 해의 5월 25일,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에서 만나자"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긴 채 각자의 길을 걷게 되죠.

시간이 흘러 쥰세이는 피렌체에서, 아오이는 밀라노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개척하며 각자의 연인과 살아갑니다. 그러나 밀라노에서의 짧은 재회는 두 사람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불씨를 다시 지피는 계기가 됩니다. 쥰세이는 자신이 보관하던 미술품이 훼손되는 비극을 겪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과거 이별의 결정적 원인이었던 아오이의 낙태와 관련된 오해를 뒤늦게 풀게 되며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오이 역시 마빈의 완벽한 사랑 속에서도 자신이 진짜 갈구하는 것은 오직 쥰세이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마빈과의 안정된 이별을 선택합니다.

마침내 약속된 서른 살의 5월 25일. 쥰세이는 아오이가 그 유치했던 옛날의 약속을 잊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지독한 열정에 이끌려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높은 계단을 오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적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오이와 마주하게 됩니다. 10년의 공백을 깨고 피렌체에서 눈물겨운 재회를 나눈 두 사람은 며칠간 꿈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아오이는 또 한 번 냉정하게 밀라노행 기차에 몸을 싣습니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의 마지막, 쥰세이는 아오이를 영영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가 탄 기차보다 먼저 고속열차를 타고 밀라노 역으로 달려가 기다립니다. 냉정을 깨부순 열정의 승리를 보여주며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5. 이 책을 읽고 느낀점: 시간의 풍화를 견뎌낸 사랑의 위대함

 이 책은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읽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보지못한 순간들이 분명있을거라 믿었기에 책을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블루와 레드를 모두 읽고 난 후, 저는 마치 한 남녀의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비밀 일기장을 훔쳐본 듯한 깊은 먹먹함에 빠졌습니다. 이 소설이 저에게 준 가장 큰 깨달음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주파수로 사랑을 기억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블루만 읽었을 때는 아오이가 너무 차갑고 이기적이라 여겨졌고, 레드만 읽었을 때는 쥰세이의 무책임함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두 권을 합쳐 하나의 세계로 완성했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냉정' 이면에 숨겨진 '열정'의 절규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이별을 하면 세월이 약이라며 잊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시간의 풍화를 꿋꿋이 견뎌내고,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사랑도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쥰세이가 미술품을 복원하듯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 첫사랑을 복원해 나가는 과정은, 인스턴트식 가벼운 만남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진짜 '일편단심'의 숭고함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내 안의 냉정과 열정의 밸런스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인생 로맨스 소설입니다.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서로를 확인하던 두 사람의 실루엣은 제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미장센으로 남았습니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을 가슴 묻어둔 채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는 어른들이라면 이 두 권의 책을 교차해 읽으며 영혼을 위로받는 특별한 경험을 꼭 해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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